전쟁 - 고구려는 중국사인가’라는 제목으로 이 문제를 다루어 대중의 관심을 크게 높였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미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기도에 관해 주목하고 있었다. 그 한 예가 2002년 12월 14일 ‘고구려사의 연구 현황과 과제’를 주제로 한국고대사학회가 개최한 학술대회에서 여호규 교수가 ‘
역사란 무엇인가?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개인과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선조들의 삶의 지혜와 미래에 대한 전망을 찾게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루어온 역사의 내면과 외면을 파악할 줄 아는 비판적 사고력을 갖게 됨으로써 앞으로의 발전에 대한 창조적 사고를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역사
< 1 > 5,6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와 고구려의 대외관계
1.5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와 고구려의 대외정책
1)5세기
a. 국제질서
439년에 북위가 5호 16국을 통일하였다. 그 결과 북위를 둘러싸고 중국의 남조 송과 북쪽의 유연, 서쪽의 토욕혼, 동쪽의 고구려는 서로 연결을 꾀하여 북위포위 견제
고구려에 대해 동족의식을 가지고 하나의 영토아래에 하나의 민족국가를 형성하고자 통일을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김영하는 신라의 ‘삼국통일’은 분단체제에 놓여있는 상황에서 남한의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결과물이라고 비판하였으며 외세의존과 통일영역의 한계를 지적하였다.
Ⅰ.머리말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나라 역사의 정체성과 그에 대한 인식이 시급하다고 요구되는 시기이다. 일본이 과거 우리에게 행했던 잔혹행위를 정당화 시키고 미화시키는 교과서를 만들어 보급하는 일로 우리 국민을 경악하게 한 일이 오래지 않아 중국 역시 고구려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
1.필자는 과학적인 역사와 비과학적인 역사를 어떻게 구별하는가?
필자는 역사를 크게 ‘사실로서의 역사’와 ‘기록으로서의 역사’로 구분하고 있다. ‘사실로서의 역사’는 과거에 일어났던 무수히 많은 객관적인 사실을 의미하고,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과거의 사건을 바탕으로 역사가가 재
전쟁 중에서 규모면과 전후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전쟁은 6.25 사변, 그리고 수, 당나라와 고구려 사이의 전쟁일 것이다. 여기서 후자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 수나라와 당나라는 엄청난 병력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고구려는 멸망하는 668년까지 그들의 공격을 훌
고구려사를 우리의 역사라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삼국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비슷
고구려와 백제 또는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이 서로 통역했다는 기록이 없고, 또한 고구려 장수왕 때 백제 개로왕의 신하인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이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이 일어나기 전 투항했다는 것과 도림이
고구려 유화정책도 고구려의 이러한 대당 온건책으로의 변화에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허나 당이 점차 자국 중심의 국제질서의 개편과 동시에 세력을 확대해 나감으로써 고구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구체적으로 당의 경관 파괴 직후에는 천리장성을 쌓아 적극적인 대비책을 강구하기도 하